교향곡 하면 떠오르는 작곡가 하이든
교향곡 하면 떠오르는 작곡가 하이든은 매우 부지런한 음악가였다고 합니다.
귀족 집안의 전속 작곡가로 쉬지 않고 음악을 작곡하고 발표하였으며
고전파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향곡 양식을 정립한 하이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고전파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인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교향곡의 양식을 정립한 음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향곡은 오페라의 서곡이 기원으로 하이든은 오페라의 서곡이 아닌 교향곡을 정립한 음악가입니다. 교향곡은 물론 협주곡, 현악 4중주, 소나타 등의 서양 음악의 양식을 정립한 음악가이지만 작품들이 너무 많기에 하이든 전곡 연주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하이든의 생애
하이든은 오스트리아의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로라우라는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이든의 아버지는 마차 바퀴 제작가였고 어머니는 귀족 저택에서 주방일을 도왔습니다. 음악가의 집안은 아니었지만 하이든의 아버지는 민속 음악에 조예가 깊고 하프를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이든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하이든의 부모님은 하이든을 하인부르크 소도시에 보내 음악교사에게 음악을 교육을 받게 했으며 그곳에서 성악과 바이올린, 하프시코드를 배운 하이든은 성당의 성가대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하이든이 성가대에서 활동을 할 때 우연히 게오르크폰 포이터라는 음악가를 만나게 되고 하이든의 재능을 알아본 게오르크폰 포이터로부터 오디션을 볼 것을 제안받았는데 게오르크폰 포이터는 빈에서 가장 유명한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음악감독이었습니다. 1740년 오디션에 합격한 하이든은 빈으로 이주하여 로이터 집에 얹혀살면서 음악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만 변성기가 찾아와 더 이상 성가대 활동을 할 수 없어 로이터 집에서 나와야 했고 생활고로 인해 고생을 하였습니다. 생활고의 압박으로 힘이 든 하이든은 동시대의 음악가들처럼 귀족 집안의 전속 음악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며 툰 백작부인과 퓌른베르크 남작 집안의 비상근 작곡가로 일하며 음악 교사로 일자리를 갖게 됩니다. 퓌른베르크 남작의 소개로 모르친 백작 집안의 카펠마이스터 즉, 악장으로 취직한 하이든은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는데 1760년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부악장 자격으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30년 가까이 일을 하였고 수많은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1790년에 니콜라우스 공작이 타계하면서 아들이 음악에 대한 지원을 줄이기로 하여 하이든은 게약을 해지하게 되고 자유로운 몸이 된 하이든은 런던을 방문하며 12곡의 '런던 교향곡집'등을 발표하였습니다. 런던에서 성공을 거둔 하이든은 1795년 빈으로 돌아와 이 시기에 종교음악을 집중해서 작곡 하였고 트럼펫 협주곡과 현악 4 중주 등의 걸작을 남겼습니다. 1802년부터 건강의 악화로 작곡에 힘쓰지 못하였고 1809년 5월 31일 사망하였습니다. 하이든은 마리아 안나 아로이지아 아폴로니아 켈러와 결혼을 하였는데 하이든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의해 이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이든의 무덤에 얽힌 이야기
1809년 하이든이 사망하고 하이든의 유언에 따라 교회가 아닌 가문의 묘에 안장을 하게 되었는데 하이든의 무덤이 파헤쳐졌고 머리가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무덤이 파헤쳐진 이유가 오스트리아 귀족이 하이든의 뇌를 조사하고 싶어서 유태인인 피터와 로젠바움에게 하이든의 머리를 갖고 오게 했는데 피터와 로젠바움은 더욱 비싼 값에 하이든의 머리를 다른 사람에게 팔고 하이든의 머리가 아닌 다른 시체의 머리를 귀족에게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1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이든의 후손들은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 노력을 끝내지 않았고 하이든의 머리를 찾아야 한다 유언을 대대손손 남기였다고 합니다. 드디어 하이든의 머리를 찾게 되었는데 유해의 주인이 소송 반환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소송이 중단되었습니다. 1954년 6월 마침내 하이든의 머리가 조국인 오스트리아로 145년 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하이든의 음악
하이든은 귀족 집안의 전속 작곡가로 오랫동안 일을 하여서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하이든 음악의 초기를 보면 바로크 음악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가 있으며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을 받은 곡들도 발표하였습니다. 1760년부터 1770년 초반에는 단조로 된 교향곡과 현악 4중주를 발표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집안에서 일할 때에는 오페라와 극음악을 주로 작곡하였습니다. 1770년대부터는 자작곡을 출판할 수 있게 되어 유럽 각지에 하이든의 명성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고전음악으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가장 유명한 음악가로 알려져 있는데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비해 하이든의 음악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너무나 많은 곡을 작곡해서였고 하이든의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지휘자와 관현악단이 딱 네 명이라고 하니 100곡이 넘는 하이든의 곡을 녹음한 연주자들도 힘들겠지만 100곡 전 곡을 다 들어본 사람도 있을까 생각되네요. 하이든의 음악은 심심하다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저는 요즘 하이든의 소나타를 다시 들어보면서 하이든의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편안해 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매일 들을 수있는 음악이라고 생각되어지네요. 하이든의 머리 도난 사건은 참 충격적이었습니다. 음악 천재 하이든의 뇌를 해부해 보고 싶다는 귀족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 10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았었다고 하니.. 음악과 다른 이야기이지만 돈이 된다면 뭐든지 하는 사람들이 그 시대에도 역시 존재했었네요. 그리고 하이든의 동생은 800곡이 넘는 교회 음악을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고전파 음악의 중요한 음악가 하이든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다음 음악가로는 모차르트를 기대해주세요.